유퀴즈 온더블럭 조선판 직업의 세계 킹덤의 착호갑사부터 선비의 테크트리 끝 조선판 치킨집까지 근데 연봉 얼마
유퀴즈 온더블럭 조선판 직업의 세계 킹덤의 착호갑사부터 선비의 테크트리 끝 조선판 치킨집까지 근데 연봉 얼마
유퀴즈를 찾아준 두 번째 손님은 조선 시대 보통 사람들을 연구해온 교수 강문종 자기님 입니다. 조선시대 연봉은 얼마였을까요?
강문종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효의정충례행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전통시대 동성애 연구」, 「한문본 『태원지』 연구」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 『조선 후기 중앙군영과 한양의 문화』, 『귤림서원』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역주 태원지』, 『기각한필』 등이 있다.
조선 시대 보통 사람들의 밥벌이를 탐구한다? 조선 시대 스드메를 책임진 웨딩 플래너부터 억대 연봉의 부동산 중개업자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판 직업의 세계' 5개만 먼저 알아볼까요?
조선판 직업의 세게 1. 착호갑사
조선 좀비물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킹덤'에서 화려한 무술 기량을 뽐냈던 영신의 직업은 '착호갑사'다. 착호갑사는 호랑이를 잡는 특수부대다. 한반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랑이 사냥터였다. 착호갑사는 1416년(태종 16년) 임시 조직으로 편성돼 이후 호랑이 사냥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 부대가 됐다.
1421년 40명, 1425년에 80명, 1428년에 90명, 세조 때는 2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성종 때 완성한 법전 ‘경국대전’은 ‘착호갑사’ 수를 440명으로 명시했다. 착호갑사가 되려면 180보 밖에서 목궁을 한 발 이상 명중시켜야 했고 두 손에 각각 50근(30kg)을 들고 100보 이상을 한 번에 가야 했다.
착호갑사는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활과 창으로 무장했다. 차이가 있다면, 일반 부대는 휴대가 용이한 각궁을 썼으나, 착호갑사는 크고 무거운 목궁이나 쇠뇌를 썼다. 각궁은 휴대가 편했지만 목궁과 쇠뇌에 비해 살상력은 낮았다. 반면, 쇠뇌와 목궁은 무겁고 컸으나 강력한 대전(大箭)을 쏠 수 있어 호랑이 같은 덩치 큰 맹수를 상대하기에 알맞았다. ‘국조오례의서설’에 따르면 대전은 길이가 5척 7촌 5분, 현재 도량형으로 환산해 160∼170cm에 달했다. 착호갑사는 호랑이를 추적해 먼저 대전을 쐈다. 명중시켜 상처를 입힌 다음 다가가 창으로 급소를 찔렀다.
착호갑사는 부대 단위로 활동했는데, 호랑이 출몰했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산으로 들어가 며칠이고 호랑이의 자취를 쫓았다. 호랑이 가죽은 값비싼 사치품으로 호랑이 가죽 한 장은 베 40~50필에 팔렸다. 연산군 때는 80필, 명종 때는 350~400필로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다. 면포 한 필은 두 냥인데, 100냥은 서울의 초가집 한 채와 맞먹는 액수다.
후기 조총이 양산 되고 나라에 10만정 이상의 총포가 깔려 시장에 총기가 거래되면서 포수들이 착호갑사들을 대신하여 호랑이를 사냥하게 되면서 착호갑사는 사라지게 된다.
조선판 직업의 세게 2. 매골승
전쟁과 기근으로 길에서 죽은 사람을 수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매골승이라 불렀는데 기원은 무려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승려들은 의술과 천문, 풍수 등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전문이었다. 병든 사람들은 의술이 뛰어난 승려를 찾아가기도 했다. 매골승은 불교식 장례인 화장을 주관하고 풍수에 맞게 묏자리도 잡아줬다.
묘를 쓰는 법에 따라 후손의 번성이 달렸다고 믿었던 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 말 요승으로 알려진 신돈도 원래는 매골승이다. 매골승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활인원 소속의 관원이 됐고, 역병과 전쟁으로 죽은 시신을 수습했다. 매골승의 업무는 기근, 역병, 전쟁으로 크게 늘었다.
병자호란 이후의 상황을 담은 한문소설 ‘강도몽유록’의 주인공 청허선사는 청나라 군대에 목숨을 잃은 강화도 백성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강화도에서는 참상이 더욱 심하여··· 산에 쌓인 것은 뼈였지만 시신을 쪼아 먹는 까마귀만 있었지 장사 지내 줄 사람은 없었다. 청허선사는 주인 없는 시신을 불쌍히 여겨 하나라도 더 거두어 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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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직업의 세게 3. 안화상
도라지를 인삼으로, 까마귀 고기를 꿩고기로, 말고기를 소고기로 속이자는 자도 있고, 누룩에 술지게미를 섞고 메주에 팥을 섞는 자도 있다.…요즘은 소금이 귀한데 간신히 사고 보면 메밀가루를 섞었다…(윤기『무명자집』)
조선 후기 서울에는 세 군데 큰 시장이 섰다. 운종가(종로2가), 배오개(종로5가), 소의문(서소문동)이다. 그중에서도 난전(亂廛)이 난립한 서소문 시장은 짝퉁의 온상이었다. 짝퉁을 파는 상인이 바로 ‘안화상(=貨商)’이다. 조선시대 서소문 시장은 짝퉁의 온상이었다.
안화상은 짝퉁, 모조품 납품업자를 말한다. 짝퉁 상인의 표적은 귀한 약재와 골동품.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인삼 납품은 공인이 담당했는데, 도라지와 더덕을 아교로 붙이거나 인삼 껍데기를 족두리풀 가루를 채워 넣어 가짜 인삼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조삼(造蔘)이라 불렸다.
조선판 직업의 세게 4. 돗자리짜는 노인
우리나라 직장인의 종착지가 결국은 모두 치킨집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조선 시대 선비의 종착지는 짚신 삼기 아니면 돗자리 짜기였다. 밑천도 기술도 필요 없다. 조금만 익히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서 농사짓는 백성은 물론 사찰의 승려도 감옥의 죄수도 모두 돗자리를 짜서 생계에 보탰다.
지금은 대나무 돗자리를 많이 쓰지만 조선 시대에 대나무는 화살대를 만드는 전략 물자였다. 이 때문에 대나무 돗자리 사용을 금지한 적도 있다. 서민들은 왕골이나 부들, 볏짚으로 짠 돗자리를 사용했다. 강화 교동의 화문석이 명품 특산물로 자리 잡은 것도 이곳이 전국에서 손꼽히는 왕골 산지였기 때문이다.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는 볏짚이었다. 볏짚 돗자리 초석(草席)의 가격은 쌀 두 말 정도였다. 돗자리 두 장을 닭 다섯 마리와 교환한 기록도 있다. 이만하면 먹고살기 충분하다. 영남 예천의 선비 박경손(朴慶孫)은 산속에 은거하며 돗자리 짜고 짚신 삼아 먹고살고도 제법 돈이 남아, 가난한 형을 돕고 제사까지 도맡았다.
조선판 직업의 세게 5. 집주름 부동산 중개업자
심노숭이 1830년 완성한 『자저실기』에는 이익모(李翊模)가 1796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집주름들을 불러 남촌과 북촌에서 가장 좋은 집을 소개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있다. 이익모가 구입하고 싶어 하는 집에 대한 설명을 들은 한 집주름이 그 집은 왕자의 궁이라고 말하자 구입을 포기한다.
얼마 후 그는 상동(尙洞, 지금의 북창동과 남창동이 걸쳐 있었던 지역)에 있는 청주 목사 홍선양(洪善養)의 고택을 구입했는데 그 가격이 무려 7000냥이었다. 한평생 집 욕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익모가 고민 끝에 사들인 홍선양의 고택은 당대 한양에서 가장 비싼 집 중에 하나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집주름의 수입, 즉 중개 수수료는 어느 정도였을까? 신택권은 「성시전도시」에서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값으로 받으니”라고 언급했다. 집주름의 중개 수수료가 거래가의 10퍼센트라는 말인데, 다소 많아 보이지만 정보 독점이 가능한 시대라는 점과 당시 고리대금의 연 이자가 보통 30퍼센트를 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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