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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매러디스 빅토리호 신생아 김치 1 ~ 5, 기네스 기록 단일 선박 가장 큰 규모 14,500명 구조 흥남 철수 작전 기적

theJungs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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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매러디스 빅토리호 신생아 김치 1 ~ 5, 기네스 기록 단일 선박 가장 큰 규모 14,500명 구조 흥남 철수 작전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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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방송에서 매러디스 빅토리호 신생아 김치 1 ~ 5, 기네스 기록 단일 선박 가장 큰 규모 14,500명 구조 흥남 철수 작전 기적에 대해서 소개되엇습니다. 상세한 매러디스 빅토리호 신생아 김치 1 ~ 5, 기네스 기록 단일 선박 가장 큰 규모 14,500명 구조 흥남 철수 작전 기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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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작전'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6일까지 흥남에서 미군 10군단과 대한민국 국군 1군단 그리고 피난민 10만여 명이 철수한 작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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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말, 북진통일을 눈앞에 뒀다고 생각한 유엔군은 서부전선을 담당하던 미8군이 중공군한테 괴멸적인 대패를 당하자 11월 30일 동부전선에서 호기롭게 북진 중이던 미10군단에게 함흥-흥남 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와중에 미10군단 산하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 9병단의 포위에 걸려 미10군단 전체가 중공군에게 포위섬멸당한다는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고 최종적으로 유엔군은 12월 8일 흥남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12월 15일 미 제1해병사단을 시작으로 미10군단 전 병력이 흥남으로 집결, 해상을 통해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1.4 후퇴의 전초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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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로로 철수하지 못하고 흥남을 통해 해로로 철수해야 했던 이유는 철수 당시 함흥-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역이 중공군 수중에 넘어간 상태였으며 12월 9일에 중공군이 원산까지 점령하면서 퇴로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즉, 배로 철수하는 것 빼고는 함경도 등지에 위치한 병력과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엔군 사령부는 해상 철수가 이루어지는 흥남항 부두를 중심으로 A구역부터 F구역까지 방어선을 설정하고, 동해에 위치한 미 해군의 함포 사격의 도움을 받으며 유엔군과 한국군은 철수를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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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내려가겠다고 흥남부두에 모여듭니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는 피난민을 데려가는 것을 꺼렸습니다. 피난민을 태우느라 시간을 지체할수록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는데다 병력과 장비, 물자를 싣는 데만도 수송선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피난민 사이에 스파이가 침투하여 파괴 공작을 하게 되면 큰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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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 한국군 지휘관들은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습니다!!"며 극렬 반발했습니다. 여기에 미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통역이었던 20살의 현봉학, 해군 군수 참모로 상륙을 담당하는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 중간에 매개체가 되어 알몬드 장군을 끈질기게 설득하니 마침내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피난민을 태우기로 동의를 받습니다! 그 결과 약 10만 명의 피난민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피난을 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공로로 훗날 현봉학 박사는 2000년 4월 그리고 2013년 7월에 호국 인물로 지정되고 2014년 12월에 국가보훈처에서 이달의 6.25 전쟁 영웅으로 뽑히기도 하였습니다. 포니 대령은 2018년 12월, 알몬드 장군은 2020년 9월, 라루 선장은 동년 12월의 6.25 전쟁영웅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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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정으로 12월 19일부터 민간인 철수가 시작되어 24일에 마지막으로 배가 떠났다. 10만의 피란민을 태운 상선과 LST는 목적지인 부산항으로 갔으나, UN군의 입항과 흥남에서 철수한 한국군과 미군으로 인해 입항이 거부되고 남쪽으로 더 항해하여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란민들을 하선시킵니다. 또 이미 부산에 도착한 피란민들 5만명도 거제도로 이동시켰습니다.당시 함경남도 원산에서 피란했던 이근용 씨는 거제도로 가야 정부가 월남한 피란민 대우를 해주었다고 하여, 부산에서 거제로 다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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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2월 23일에 출항한 상선으로 가장 많은 피란민을 태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가장 마지막에 출발한 배는 LST 온양호로 12월 24일에 출발했습니다.

대전광역시의 유명한 빵집 성심당의 1대 창업자인 임길순 암브로시오 역시, 이 당시 가족들과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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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워낙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다 보니, 이동 중에 신생아 5명이 태어났다. 이에 항해사 로버트 러니가 김치 1, 2, 3, 4, 5라는 이름을 붙여 줍니다. 김치 1은 서울에 거주하는 손양영이고, 김치5는 거제도에 있는 장승포 가축병원의 이경필 원장으로 생존 중입니다.

"흥남에서 피란민을 배에 태울 때 라루(Leonard LaRue·1914 ~ 2001) 선장은 사무장 로버트 러니(J.Robert Lunney·93·당시 일등 항해사)에게 '1만명까지 카운팅하라'고 했어요. 1만명을 돌파하고는 1만 2,000 ~ 1만 3,000명까지 세다가 더 세는 것을 포기했다고 하더라고요. 어림짐작으로 1만 4,000명이 탄 거죠." 이경필(김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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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액션리포트'

맥아더 기념관에 보관된 한 장의 서류. 액션리포트(작전보고서)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6.25전쟁이 끝난 후 무려 23년 간 기밀에 부쳐져 있다가 70년대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액션리포트에는 보름간 진행된 흥남철수작전의 진행 과정이 매우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작전에 동원된 배는 군함부터 세계 각지에서 달려온 상선, 심지어 어선까지 다양했다. 그들이 각종 무기와 짐, 기름까지 버리고 실은 것은 '크리스마스 카고'라는 별칭으로 기록된 특별한 화물, 바로 민간인 피난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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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공개) 피난민을 구한 13척의 배

장진호 인근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미 10군과 국군을 구하기 위해 막힌 육로 대신 해상철수를 결정한 한미연합군. 남한군이 흥남부두에서 철수한다는 소문을 들은 북한 피난민들은 목숨을 걸고 흥남부두에 집결한다. 그러나 피난민들을 위한 구조계획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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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나선 사람이 연합군 소속 민사부 통역관으로 흥남에 있었던 현봉학 선생이다. 동포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포니 대령과 함께 아먼드 장군을 설득했고, 극적으로 민간인 수송 허가를 받아내기에 성공한다.

■ 운명을 바꾼 항해

흥남을 떠난 배들의 목적지는 부산과 거제도. 배들이 정박한 곳에는 여지없이 대규모의 피난민촌이 생겨났다. 빈손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은 그곳에서 다시 처음부터 새 삶을 쌓아올려야 했다. 피난민 중에는 화가 이중섭. 현재 대전의 명물로 손꼽히는 '성심당'의 창립자도 있었다. 1950년 흥남부두를 떠난 뒤 71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은 삶은 저마다 다르지만, 또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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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 레너드 라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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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 피란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것,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들처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하려는 중공군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 최초 공개 -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일지

92세의 멜 스미스는 21살의 나이에 2등 기관사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랐다. 그곳엔 2등 항해사인 로버트 러니, 3등 항해사인 벌리 스미스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71년 전 흥남에 도착한 날, 배에 전달된 기묘한 명령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화물선인 배에 화물 대신 사람을 가득 태울 수 있겠냐는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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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들의 배는 군함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의 명령을 얼마든 거절할 수 있었지만, 흥남부두의 상황을 지켜본 배의 책임자 '레너드 라루' 선장은 곧바로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 그 날의 상황이 기록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일지를 '다큐on'에서 최초 공개한다.

■ 정원의 200배를 넘긴 승객, 그리고 김치 5의 탄생

당시 13살 소년이던 '양승권'씨는 흥남부두에서 라루 선장의 결단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하게 된 피난민 중 하나였다. 그는 나무로 만든 임시 갑판을 세우고 쉴 새 없이 광주리에 사람을 실어 올리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모습을 또렷이 떠올린다. 그렇게 정원 60명의 배에 누울 자리도 없이 서로를 껴안은 채 빽빽하게 올라탄 14000명의 피난민.

그들을 태운 선원들마저 물도, 난방시설도 없는 이 열악한 항해에 남쪽에 도착하면 절반 이상은 죽을 거라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3일 동안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오히려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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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장에서 수사로, 47년 만에 밝혀진 선장의 마지막 행적

14005명을 살린 기적의 항해로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레너드 라루' 선장. 그러나 라루 선장은 흥남에서의 항해 이후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리고 47년 뒤, 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곳은 놀랍게도 미국 뉴저지에 위치한 한 수도원이었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카톨릭 수사 '마리너스' 신부가 되어 성물방에서 제2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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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신도들에게조차 선장으로서의 삶을 알리지 않았던 마리너스 신부는 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지자 47년 만에 처음으로 스스로 흥남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가 건넨 마지막 부탁은 한국인이 보고 싶다는 것. 마리너스 신부의 장례식엔 한국인 신도들이 참여해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영면에 든 후에도 그가 이어준 한, 미 수도원의 특별한 인연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

한편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전쟁 이후 가톨릭 수도회인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고, '마리너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마리너스 수사는 수도회 입회 전에도 미국 가톨릭 해양선교단체인 '바다의 사도'에서 회원으로 활동한 신자였다. 그는 생전 흥남 철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피난민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배에 태울 수 있었습니다. 1만 4,000명의 목숨을 구하면서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깨달았고, 그 때문에 수도회에 입회하게 되었습니다.

마리너스 수사는 평생동안 흥남 철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고 조용히 수도생활에 매진하다가 2001년에 사망했고, 사망 후에야 뒤늦게 그의 행적이 알려지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마리너스 수사가 지내던 미국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2000년경 경영난으로 폐쇄될 뻔했는데,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위치한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지원해서 복구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왜관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원래 원산 옆에 있는 덕원에 위치했으니까. 이 사연은 공지영 마리아 작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2017년부터 마리너스 수사에 대한 시복(복자품에 올림) 절차가 미국 가톨릭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다. 2021년 라루 선장을 성인으로 시성하려는 움직임이 미국에서 본격화됐다.

미국천주교주교회의는 춘계회의 이틀째인 6월 17일, 라루 선장과 조지프 버비스 러플로 신부에 대한 지역 교구의 성인 추대 절차를 승인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번 회의에서 두 사람은 모두 주교 99%의 찬성을 받았다. 이번 승인에 따라 하느님의 종 지위에 있는 라루 선장을 시성을 위한 다음 절차인 복자로 시복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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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고가 김용삼, 「아비규환의 겨울 부두」, 『한국 현대사 119 대사건』, 101.p, 월간조선 엮음, 조선일보사, 1993

피난민과 학도병, 국군을 가득 실은 목선은 남으로 뱃머리를 돌려 험한 파도를 뚫고 달렸다. 뱃머리에서 부서진 파도가 튀어들면서 얼어붙어 온 몸에 얼음조각을 뒤집어 썼다. 엄마 품에 안겼던 아이가 새파랗게 얼어 죽기도 했다. 그 때 피난민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아이를 업고 있던 30대 중반의 젊은 여자를 노려보더니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에미나이 남편이 빨갱이다이. 악질 빨갱이가 무슨 낯짝이 있서 이 배를 탔슴."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주위 사람들이 악바친 목소리로 아우성쳤다. "저년 죽이라우. 배에서 끌어내우다!" 새파랗게 질린 여자는 주르르 눈물을 쏟더니 이를 악물었다. 아이를 업은 채 배에서 뛰어내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커다란 파도가 아이와 여자를 꿀꺽 삼켰다. 그냥 있었어도 맞아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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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식 중령의 증언(민족의 증언: 중앙일보)

12월18일 철수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알몬드 장군이 불러서 갔습니다. 장군은 함경남도지사[3]와 어느 목사 등 3명의 민간인만 데리고 가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아연실색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적어도 10만 명은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로 알몬드 장군과 옥신각신했습니다. 나는 나와서 곧바로 김백일 장군에게 보고했습니다.

김백일 장군은 '미국이 영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국군 1군단이 피란민을 엄호하면서 육로로 후퇴하자'고 말했습니다. 참모들이 모두 동의했습니다. 19일 다시 알몬드 장군 측을 만났더니 '3,000명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절대로 안 된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로로 가겠다고 하자 '노, 노' 하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편, 『로버트 러니와 흥남부두』 pp.7~ 11

다음날 오후에 우리는 부산에 닻을 내렸다.안심? 모든 얼굴이 빛을 발했다. 그러나 이것이 여행의 종착역은 아니었다.
장교가 다가왔다.

"여기 14,000명의 피난민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어디다 그들을 내려놓을까요?"
그러나 나는 그들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여긴 안돼요." 그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해양적 군사적 이유를 수없이 들었지만, 우리의 황당함이란! 그리고 우리의 피난민들이 아직도 더 악몽같은 항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거제도로 가시오." 라고 그들은 말했다. "남서쪽으로 50마일만 가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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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의 소설 <흥남 철수> 중에서 인용

그 날 아침의 배는 6시 15분에 닿았다. 눈바람을 무릅쓰고 얼음판 위에서 밤을 새운 군중들은 배가 부두에 와닿는 것을 보자 갑자기 이성을 잃은 것처럼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곤두박질을 하듯이 부두 위로 쏟아져 나갔다. (중략) 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해서 일단 혼란이 멎었으나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또 그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 가려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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